↑ ⓒ시사IN 한향란 10월14일 늦은 밤,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 수업에 참석한 CEO들이 국악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장면 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졸업을 못했다. 출석 일수가 모자라서다. 최 회장은 지난 학기 서울대의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FP)에 등록했지만 이수 요건인 '3분의 2 이상 출석'을 하지 못해 중도 탈락했다. 엄격한 학사 관리 때문인지 이번 3기 수강생들은 바짝 긴장해 있다. CJ엔터테인먼트 김주성 대표이사, 이건영 빙그레 대표이사, 김중겸 현대엔지니어링 사장, 최병렬 신세계푸드 대표이사, 케이투코리아 정영훈 대표 등 국내 내로라하는 CEO도 학생의 위치에서는 별 도리가 없다.
'학생' 이학수와 '선생' 진중권
사람 만나는 일로 분초를 쪼개 사는 CEO (전문경영인)들 사이에 '특별한' 공부 바람이 불었다. '열공 인문학' 바람이다. 대학이나 기업연구소를 중심으로 개설된 인문학 강좌에 기업인의 호응이 뜨겁다. 대학 중에서 가장 먼저 인문학 과정을 개설한 서울대 현장을 찾았다. 지난해 8월 인문대에 개설된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인 아드폰테스 프로그램(AFP·Ad Fontes Program).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원천으로'라는 라틴어 표현에서 이름을 따왔다.
10월14일 오후 5시 서울대 규장각 입구에 검은색 세단들이 속속 멈춰 섰다. 이날 수업은 규장각 서고에서 이뤄졌다. AFP 주임교수인 이태진 교수(국사학과)는 규장각을 만든 정조가 사대부층의 여론을 뛰어넘어 일반 백성의 여론을 직접 수렴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배경을 설명했다. "대민이 아닌 소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면 왕이 신하보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
한 시간가량 현장 수업이 끝난 뒤 수강생들은 다음 강의실로 이동했다. 삼삼오오 회사 걱정이 오갔다. "키코 문제는 정리가 잘 됐나요?" "환율 때문에 미치겠어요." 금융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한국투자증권의 윤성일 상무. '요즘 어떠시냐' 물으니 "어휴" 한숨부터 내쉰다. 전쟁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그는 왜 한가하게 인문학을 배우러 온 것일까?
"쫓겨서 살다가 완전히 딴 세상에 온 기분이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다. 월가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으니 우리나라에도 곧 닥치겠지만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처럼 사람 줄이는 게 능사인지, 우리 회사도 고민하다가 이번 신입사원 공채는 정원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뽑기로 했다. 잘한 것 같다."
주문한 도시락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2부 강의가 시작됐다. '한국 전통의 미'라는 주제로 황준연 교수(국악과)가 강단에 섰다. 황 교수가 "인문학은 선비가 되는 공부"라고 서두를 꺼내자 한 수강생이 "예, 과거시험 준비합니다"라고 화답해 장내 웃음이 터졌다. "여러분과 내가 이렇게 만나게 된 상황이 굉장히 어색하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미 교육이 되었어야 하는데 국악은 이제 초등학교 1, 2학년 교과서에서도 사라졌다." 이어 소규모 국악연주회가 열렸다. 수강생들은 판소리의 고수 장단에 맞춰 '얼쑤' '좋다' 추임새를 넣으며 호응했다. 몇몇 수강생은 공연 장면을 담으려고 휴대전화로 동영상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강의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CEO판 주경야독이다.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 내용을 열심히 받아 적던 금호고속 이원태 사장에게 강의 소감을 물었다. "우리 판소리처럼 악보 없는 음악이 더 좋은 음악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악보가 음악을 가둔다는 발상은 한국적이다." 인문교육이 이들의 내면을 자극한 듯하다. 이원태 사장처럼 "실용 지식을 갖춘 전문가보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인재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CEO가 많아졌다. 당장 실천으로 옮겨진 사례도 있다. AFP 과정을 거친 한 대기업 회장은 인문대 출신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며 신입사원 채용 때 전공 차이를 두지 않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영혼'을 기다리는 CEO들
지난 9월 첫 학기를 시작한 성공회대의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은 신영복 교수가 원장으로 있는 인문학습원이 주관한다. 신 교수는 매주 월요일 강의 때마다 정동 성공회성당 수녀관에 마련된 교육장에 나와 일일이 수강생을 맞이하고 강의가 끝날 때까지 남아 전 과정을 꼼꼼히 챙긴다.
성공회대가 CEO 인문학을 시작한 배경은 좀 특별하다. 2년 전, 그야말로 한국 사회 각계에서 두루 참석한 신 교수의 정년퇴임식에서는 기업가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도 이학수 전 부회장이 도드라졌다. 그는 신 교수와 동향(경남 밀양) 선후배 사이인데, 후원금으로 2억원을 쾌척했다. 이 전 부회장뿐만 아니라 당시 몇몇 기업 인사가 후원했는데, 이 돈으로 '신영복 기금'이 조성됐고 이는 대학 발전기금으로 보태졌다. CEO 인문학은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한 신영복 교수 나름의 환원 방식인 셈이다.
신 교수가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인사말은 이런 것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춰 서서 달려온 길을 한동안 바라본다고 한다. 혹시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했을까봐 기다린다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든 사회의 경영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인문학습원은 앞으로 CEO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군으로 인문교육을 확대할 예정이다.
창원대에서는 지역성을 살려 중소기업인을 상대로 '인문최고 아카데미 큘리아'를 개설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황지우 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과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등이 강의했다. 이 외에도 여러 대학에서 CEO 인문학 개설을 준비 중이다. CEO 인문학은 산학협동의 성공 사례였다. 이태진 교수는 "경영인들이 인문학 열성분자가 된 현상 앞에서 오히려 교수들이 당황스러워한다. 마치 마른 장작과 같이 쉽게 활활 타오른다"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같은 열기는 '위기'에서 비롯했다. 대학은 대학대로 인문학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복잡해진 경영환경으로 기업 쪽의 위기감 역시 커져 있었다. 사람을 연구하는 인문학과 사람을 다루는 경영의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지난해 열린 인문주간 행사에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참석해 기조발제를 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손 회장은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 기업의 고객도 사람, 기업이 속해 있는 사회도 사람, 따라서 사람에 관한 학문인 인문학이 기업경영에서 소홀히 다뤄져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사장 출신인 이계안 전 의원은 지금 미국에 머물고 있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며 재충전하고 있는 이 전 의원은 "나로서는 좋은 경험을 하고 있지만…"이라며 금융공황을 겪고 있는 미국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부는 간섭 말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경제 논리가 뒤집어졌다. 공화당 의원들이 사회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전문가의 예측은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소련 붕괴 후 혼자 잘나가던 미국이 지금은 각 나라에 손을 벌리고 있지 않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본질을 보지 못하면 새 환경에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문학 공부 현장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한결같이 이같은 위기감을 토로했다. 우리 기업은 그동안 빨리 뒤쫓아가는 것으로 생존해왔지만 이제는 미국이라는 추종 모델이 붕괴된 이상 독자 판단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할 때 경영이 인문에 손을 내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특히 한국의 경영자들은 취약하다. 질문도 답도 교사가 내고 학생은 그저 외우는 교육 환경에서 자란 데다 한국의 경영자들은 독창적 발상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상당수 CEO는 대학에서 경제·경영을 전공했다. 미국만 해도 학부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배우는 경영인들이 많다지만, 한국은 거리가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계약 체결을 하다보면 며칠 동안 협상 파트너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화젯거리가 없어 불편했던 적이 많았다"라고 토로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인문학이 없었다면 나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은 경영의 영역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한 대표 어록에 속한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인문과 경영은 아직 제대로 만났다고 보기 어렵다. 경영자가 인문학 그 자체에 깊은 공감을 한다기보다 일상에 위안을 주는 부분이 커 보인다. 경영 효율화만 외치던 그들에게 일단 낯선 세계로의 초대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CEO의 심리를 심층 분석해온 정혜신 대표(마인드프리즘·정신과 전문의)는 CEO 인문학의 경향에 대해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들이어서 내면의 깊은 부분을 인문학이 자극하고 사고의 확장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인문과 경영의 '창조적 긴장'
인문학계에서는 긴장하는 시선도 느껴진다. 사회와 개인에 대한 규율 원리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절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의 '인간존중'이라는 표어는 곧잘 노동의 유연성=해고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 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인문학은 지극히 내면적인 마음의 성숙과 변화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지표로 환원될 수 있는 성과주의 교육 목표로는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전에 이 느린 방식의 교육 목표에 대해 교육기관과 교육 담당자가 합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최근 CEO들을 상대로 '유쾌한 삶, 즐거운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경영과 인문학 사이의 '창조적 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려는 경영전략에 인문학이 봉사한다면 이해를 뛰어넘어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정신에 위배된다"라고 말했다. 인문학이 경영의 도구가 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들린다.
박형숙 기자 / ph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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