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1902∼1934)
1.
시인. 본명은 정식. '소월'은 아호. 평북 정주 출생. 1920년 '낭인(浪人)의 봄'을 <창조>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고,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 1934년 12월 사업의 실패와 세상에 대한 실의로 고민하다가 음독 자살하였다. 1924년 <영대> 동인.
민요시인, 국민시인, 전통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전통적 율조와 정서를 성공적으로 시화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 눈물, 정한 등을 주제로 시화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 눈물, 정한 등을 주제로 하며,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독특하고 울림이 큰 표현을 이룩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바로 이와 같은 특징이 그를 한국 현대시인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가장 많이 연구된 시인이 되도록 한 것이다.
* 경향 : 민요적 가락과 소박하고 향토색 짙은 서정,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의 기본 감정으로 정착되어온 한과 같은 민족의 보편적 정서, 임의 부재에 따른 상실과 좌절, 반복적 운율을 살린 점이 특징이다.
* 소월시의 시사적(詩史的) 위치 : 소월의 시는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와 민요적 율격에 밀착되어 있다.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恨)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소월시는 서구 편향성의 초기 시단(詩壇) 형성 과정에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전범(典範)이 된다. ① 향토성 ② 민요조의 가락(민요풍) ③ 민족의 설움과 한(恨)의 정서 수용(민족 정서)
시집으로는 '진달래꽃'(1925)이 있으며, 그가 작고한 후 이에 기타 발표작을 수습, 첨가해 많은 시집이 발간되었다.
2.
본명 정식(廷湜). 평북 구성(龜城) 출생.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등을 《학생계(學生界)》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영대(靈臺)》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그 후 구성군(郡)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7 ·5조의 정형률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3.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1902년 8월 6일 평북 구성에서 출생하였다.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도쿄 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로 중퇴하였다.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이하 5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하였고, 김억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17편의 번역시를 포함하여 모두 27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4년 12월 24일 고향 곽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소월은 한국 근대시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20년대 한국시단은 문예동인지를 중심으로 서구 문학이 소개되고, 창작면에서도 자유시를 비롯하여 소위 근대시라는 것이 형성될 무렵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래의 율격이나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시의 제작도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곧 민요조 서정시다. 김소월은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김억, 주요한의 뒤를 이어 내용과 기법면에서 새로운 차원을 개척했다. 내용면에서 그는 민담, 민요, 향토적인 소재를 제재로 수용하면서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로 표출해내었고, 기법면에서는 3음보격의 율격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한편 음성상징, 호음조, 소리의 공명 등을 이용함으로써 그의 시에 언어의 탄력성 내지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진달래꽃>, <먼 후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산유화>, <접동새> 등 공적인 감정보다는 개인적인 아픔을 드러내는 시를 썼으나, 후기에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무리 벌의 노래>, <옷과 밥과 자유> 등과 같이 식민지적 빈궁이나 한계상황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시를 쓰기도 했다. 시집으로 <<진달래꽃>>(1925)이 있다.
<대표 작품>
진달래꽃
1922년 7월 <<개벽>> 제25호에 발표된 김소월의 시작품. 우리의 고대 시가인 <가시리>와 <아리랑>의 맥을 잇는 이별가의 백미로서 김소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 속에 우리 민족의 원형과 부합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어쩔 수 없는 `이별'의 모티브가 기본축으로 자리해 있는데, 이 때 떠나보내는 이의 가슴 속에는 `한'의 정서가 간직되어 있다. 그것은 이 작품 속의 화자, 곧 님을 떠나보내는 이가 이별의 상황 앞에서 그것을 자학과 체념과 인내로 넘어서고자 하는 데서 만들어진 정서이다. 즉 이 작품의 화자는 님과 이별해야 할 야속하고도 서러운 상황 앞에서 그 님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다는 어려운 다짐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달래꽃을 님이 떠나는 발길 아래 한아름 깔아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있으며, 더욱이 님에게 그 진달래꽃을 마치 축제의 주인공처럼 "즈려밟고" 가시라는 축복을 말을 전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화자의 지순하고도 고운 마음이, 사실은 그 이별을 온전하게 승화시킨 결과라기보다 화자의 마음 속에 풀릴 길 없는 한의 덩어리를 남겨 놓고 있다는 점이 제 4연에서 발견된다. 화자는 제 4연에 이르러 앞에서 보여준 태도와는 달리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말로 그가 한을 품은 채 자신의 터져오르는 감정을 얼마나 힘겹게 억제하고 있는가를 시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달래꽃>은 남녀간의 이별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역설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우리 민족의 원형에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산유화
1924년 10월 <<영대>> 3호에 발표된 김소월의 시작품. 총 4연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김소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김소월이 이 작품에서 보여준 사상은, 이른바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하며 움직이는 무상(無常)의 우주적 원리에 대한 동경이다. 시인은 이와 같은 사상을 "山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꽃이 피네"라는 1연과 "山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라는 제 4연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산에는 끊임없이 꽃일 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꽃이 지기도 한다는 내용은 일견 매우 평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인간의 표피적인 눈을 넘어선 수준에서 우주 속에 처음도 끝도 없이 생명하고 변화하는 존재의 실상이 날카롭게 포착된 한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그와 같은 산에 피어 있는 꽃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는 제 2연의 내용과, 바로 그러한 꽃이 좋아서 산 속의 작은 새가 꽃과 어울려 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제 3연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두 연의 내용으로부터 처음도 끝도 없는 거대한 우주적 질서 속에서 탈속의 존재가 되어 우주 혹은 자연과 함께 어울려 있는 꽃과 새의 모습을 만난다. 이런 점에서 <산유화>는 우리의 민족어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높은 시적 가능성을 입증한 작품이기도 하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다면
시집 <<진달래꽃>>(1925)에 수록되어 있는 김소월의 시작품. 김소월의 작품 중에는 당대의 식민지적 상황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저항한 시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인데, 이 작품은 저항성과 민족의식을 직접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총 4연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상화의 작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김소월은 여기서 집을 잃고 떠도는 상태 혹은 땅을 빼앗겨서 밭을 갈고 김을 맬 수도 없는 상태로 우리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 상황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밭을 갈고 김을 맬 수 있는 땅이 있었으면' 혹은 `하루종일 즐겁게 일을 하고 저녁이 되어 뿌듯하게 집으로 함께 돌아올 수 있었으면' 하고 소망한다. 이와 같은 소망과 현실 사이에서 그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갈등을 하며 탄식을 하기도 하나, 이 작품의 마직막 연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의 갈등과 고민이 암담한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김소월은 희미하지만 희망으로 가는 길을 예감하고, `한걸음 또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노동할 터전조차 잃어버린 민족적인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민족의 비애와 꿈을 실감있는 언어로 형상화한 김소월의 대표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초혼
시집 <<진달래꽃>>(1925)에 수록되어 있는 김소월의 시작품. 이 작품의 시적 출발은 우리의 전통적 장례의식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고복의식(睾復儀式)을 빌어 이루어지고 있다. 민간에서는 흔히 초혼(招魂)이라고 불리우는 이 고복의식은 이미 죽음으로 인하여 떠난 혼을 다시 불러 들여 죽음 사람을 살려내려는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을 의식화한 것으로서, 임종한 직후 북쪽을 향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가 중심을 이룬다. 이 작품은 고복의식을 하나의 모티브로 사용하여 사랑하는 님과 화자 사이에 놓인 엄청난 단절의 거리를 우선적으로 인식하고, 이어서 그러한 단절의 거리를 좁혀 보려는 화자의 뜨거운 소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에서 화자와 떠나간 님 사이의 그 엄청난 단절의 거리는 "하늘과 땅 사이"로 표상되어 있거니와, 그 "하늘과 땅 사이"를 하나로 이어보려는 화자의 간절한 꿈이 님을 부르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들로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등의 표현이 한결같이 하늘과 땅 사이로 표상된 님과 화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노력의 표상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하여 죽은 님이 되살아오지는 않는다. 이 작품 속의 화자는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여도/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전통적인 망부석 모티브를 이끌어 들이면서 결코 단절의 심연 앞에서 굴복할 수 없는 자신의 극단적인 심정을 비장한 태도로 보여주고 있다. 이 비장미야말로 <초혼>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옷과 밥과 자유
1928년 7월 평양에서 발행된 동인지 <<백치(白稚)>> 2호에 발표된 김소월의 시작품. 원래 1925년 1월 1일 <<동아일보>>에 <서도여운(西道餘韻)-옷과 밥과 자유>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것을 개작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 작품은 절제된 언어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우리 민족의 실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김소월은 이 작품을 통하여 당대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이야말로 옷도 없고, 밥도 없으며, 자유도 없는, 서글프고 고단한 현실임을 밝히고 있다. 김소월은 이런 사정을 첫 연에서 공중을 떠다니는 새를 보며 탄식조의 이야기로 형상화한다. 요컨대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새는 그의 몸에 털도 있고 깃도 있는데, 왜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는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조차도 없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제 2연에서 밭과 논에 가득찬 곡식을 바라보며 그와 같은 외적 풍요 속에서도 사실상 밥조차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당대 우리 민족의 굶주린 현실을 말하고 있다. 끝으로 제 3연에 이르러, 등 위에 짐을 가득 싣고 험난한 고개를 넘어가는 당나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 그 당나귀의 고달픈 모습이야말로 자유조차 빼앗겨버린 이 시대 우리 민족의 모습과 같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옷과 밥과 자유의 상징은 그 당시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물론 의식주까지 박탈당한 우리 민족의 실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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