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Development

인문학을 찾는 CEO가 늘고 있다.

이학 2008. 6. 29. 11:50


인문학자 “기업생존에 인문학은 선택 아닌 필수”

경영자 “이윤추구? 아니죠, 윤리경영? 맞습니다”

 인문학이 CEO들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이익을 남기는 것이 회사라는 과거의 기업 개념이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철학과 역사, 문학작품에 귀를 쫑긋하는 CEO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렇다 보니 ‘이윤추구’에서 ‘윤리경영’의 모습으로 기업 색깔 자체도 살짝 바뀐 듯하다.

<이코노믹리뷰>는 인문학을 찾는 CEO와 인문학을 강의하는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 CEO가 인문학을 끌어안는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보기로 했다. 대담은 지난달 29일 세종호텔 일식당 후지야에서 이뤄졌다.

대담자 :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 주장건 세종호텔 회장     사회 :  김진욱 기자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  

“현대에 와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입니다. 기업이든 어떤 전문직종이든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서는 통찰력을 키우는 인문학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장건 세종호텔 회장  

“기업은 고객 측면에서 내부고객과 외부고객을 모시고 있습니다. 직원이 바로 내부고객이죠. 결국 고객만족을 위해서도 직원과 일반 소비자들을 동일시하며 경영자들은 인간적인 배려를 고민해야 합니다.”
                                                                  

Q 최근 들어 인문학을 찾는 기업 CEO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황경식 교수(이하 황) : 사실 인문학은 사양길을 걷고 있습니다. 실용학문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죠. 크게 문학, 사학, 철학이 핵심인 인문학에 비해 현대 사회에서는 의학, 법학 등 실용학문이 부각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현대 사회의 특성에 있습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면서 이를 헤치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넓고 깊은 통찰’을 찾는 노력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통찰이란 ‘인사이트’(Insight·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보는 통찰)와 ‘오버뷰’(Overview·널리 종합적인 관점에서 두루 살펴봄)를 말하는 것인데 이 둘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주장건 회장(이하 주) : 지금 CEO들이 인문학을 찾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 직장이라는 개념이 ‘가난극복의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나’란 존재를 어떻게 표출하느냐, 즉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사회에서 실현하는 수단으로 직장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매일 아침 월급을 받기 위해서만 출근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문학이라는 게 최고경영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닌 현대인(직장인) 누구나에게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요소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그렇다면 개인이 아닌 기업의 관점에서 볼 때 인문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지금까지 이윤극대화에 경영의 초점이 맞춰졌다면 앞으로는 인간을 생각하는 경영, 즉 인간적 경영이나 인간다운 경영을 의미하는 ‘인문경영’으로 대상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최근 기업이 윤리(인문학)를 잘 접목해 좋은 실적을 나타냈다는 보고서를 본 적 있습니다. 이윤을 추구했을 때보다 기업윤리에 더 가치를 뒀을 때가 좋은 성과를 얻었다는 얘깁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기업과 인문경영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 현재 기업에서 많이 쓰고 있는 키워드가 두 개 있는데 그것은 ‘투명성(Transparency)’과 이에 반대되는 ‘돈세탁(Money laundering)’입니다. 미국 엔론사는 결국 돈 세탁과 투명성이 문제였고 한국의 삼성 역시 투명성 때문에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삼성 사태’ 처럼 기업들이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있는 상황을 사건 중심으로 보지 말고 사건의 원인을 따져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잘 보면 모든 원인이 윤리경영과 연결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자본금을 출자했고 하니 이것은 내 회사고 직원들도 내 것이다’는 인식을 가졌다면 이제는 그런 시각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Q 인문학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총체적인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요.

: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이라는 말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산의 많은 나무 중 옹이(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가 많은 나무는 쪽쪽 곧지 않아서 나무꾼들이 와도 베어가질 않습니다. 나무꾼에 의해 소외받는 나무인 거죠. 하지만 천대받는 이 나무가 산 속의 정자를 지탱하는 ‘머릿나무’로 쓰입니다. 기업의 사례로 눈을 돌려볼까요. 큰 기업의 경우 ‘기획실’이라는 부서가 있습니다. 사실 이 부서는 특별한 임무가 없지만 ‘태스크포스’처럼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이 부서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처럼 인문학은 실용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쓸모가 없을지 모르지만 개인이나 기업에게 중요한 순간, 인문학적인 자양분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 기업경영에 있어 인문학이 필요조건이라는 황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지속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기계가 대체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수요와 공급에 있어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물건만 있으면 팔리는 시대였지요. 그러나 이제는 대량생산 사회를 넘어 물건이 넘치다보니 소비자 중심에서 소비자들이 자기가 사야할 것은 뭐든지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물질적인 것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얘기지요. 따라서 오히려 한 단계 더 들어가 물질적인 것 보다는 개성이나 감성을 드러내는 상품이나 기업경영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사고가 아닐까 합니다.

Q 역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왜 인문학을 찾는 기업인들이 많지 않았던 걸까요.

: 인문과 현실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영자들은 이윤극대화라는 현실적인 욕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던 겁니다. 무관심이었죠. 또 한편으로는 인문학도들이 현실에 너무 무책임한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을 보통사람들이 일상에서 접촉하지 못하도록 ‘고고한 학문’이라는 왜곡된 인식만 쌓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경영과 인문학의 만남이 이뤄진 것은 현실 쪽(경영자)에서 인문학에 먼저 노크한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자들의 노력 때문이 아닌 경영자들의 자생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죠.

Q 최고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인 서울대의 AFP 과정에 최근 많은 CEO들이 참여했습니다. 특히 황 교수님은 직접 강의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주로 어떤 이들이 강의를 들으러 옵니까.

: 크게 두 부류입니다. 현재 최고경영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과 CEO로 있다가 현직에서 은퇴하신 분들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전 직원과 전 업무를 오버뷰하는 데 인문학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찾아오신 경우고(자생적인 니즈때문에 오신 경우), 후자는 최고경영자였을 때는 현실에 시달려 인문학에 대한 접촉을 꺼렸다가 은퇴 이후에서야 인문학을 몸소 느끼기 위해 오신 분들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최고경영자의 위치에 오르기 전에 인문학적 소양을 먼저 갖췄다면 더 양질의 기업경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Q 주 회장님도 서울대 인문학 과정을 수료하신 것으로 아는데, 수강 전과 후 실제 경영전반에 걸쳐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 강의 이후 “뭐가 바뀌었나”는 질문을 많이 받곤 하는데 강의효과가 바로 나타나기 보다는, 충분히 뜸을 들여야 찰진 밥이 되듯 서서히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다만 요즘에는 예전보다 ‘어떻게 하면 직원들에게 행복한 직장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동안 직원들이 불편해 한 것은 뭐였나’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확실합니다.

기업은 고객 측면에서 내부고객과 외부고객을 모시고 있다고 생각할 때 직원이 바로 내부고객입니다. 결국 고객만족을 위해서도 직원과 일반 소비자들을 동일시하며 경영자들은 인간적인 배려를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 저는 주변에서 들은 얘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얼마전 LG생명과학에 인문학 강의를 나간 적 있는데 AFP 과정을 수료한 이 회사 김인철 사장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를 듣고 놀랐습니다. 직원들 말로는 “사장님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회의 때나 일상적으로 만날 때면 으례 사무적인 얘기만 했는데 요즘에는 인문학적인 얘기를 많이 담는다고 합니다.

Q 최근 삼성 사태 역시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실 얘기가 많으실 텐데요.

: 사건의 외형보다는 내면을 볼 때 기업의 윤리경영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앞서 말했듯 기업이 이제는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단계에서 발전해 투명성 확보가 핵심영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행동이 ‘내부고발자’라는 평가를 받기 보다는 기업문화가 업그레이드되는 데 동기를 부여했다는 쪽으로 평가받아야 함이 바람직합니다.

: 얼마전 지인들을 만나 식사를 같이하면서 김 변호사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김 변호사 개인은 얻은 것이 없지만 우리 사회는 굉장히 많은 것을 얻었다는 게 당시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김 변호사 개인도 어떻게 보면 희생자지만 삼성 역시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분명한 것은 이번 삼성 사태로 인해 ‘내가 차린 회사라도 돈을 빼내서 마음대로 쓸 수는 없겠구나’라는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는 겁니다.

Q 해외 CEO들도 인문학을 많이 찾고 있는데 혹시 우리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습니까.

: CEO의 상황이 우리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인데 큰 기업을 빼고 미국 CEO들의 학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명문대를 거쳐간 케이스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참조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다니다가 커뮤니티 칼리지에 들어간다든가, 아니면 필요에 의해서 공부를 추가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명문대에서 전문경영인으로 데뷔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교육과 학문이 유기적으로 잘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학력보다는 능력 위주로 CEO들이 나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CEO들은 통상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나 인문학적 사고를 겸비한 채 최고경영자에 오른 케이스가 많습니다. HP의 피오리나 전 회장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는 계획적으로 인문학을 배워서 HP의 총수가 된 게 아니라 기본적인 소양에다가 경영학이라는 것을 접목한 경우입니다.

Q 마지막으로 인문학자 입장에서 경영을, 그리고 경영자의 입장에서 인문학을 논해보신다면.

: 경영이라는 것이 재정적인 면에서의 경영도 있지만 인간경영이라는 부분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인간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에 최고경영자들은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현대적인 경영은 인문학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기업들이 윤리경영을 선언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영에서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18세기 산업혁명을 경영사의 시작으로 보는데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보면 자본주의 역사가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됐습니다. 네덜란드가 생산과 금융을 잡고 있었는데 당시의 시스템은 독점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졌습니다. 산업시대로 들어오면서 수요와 공급이 전체를 결정했고 지금은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이 시스템을 총괄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지식사회에서 서비스를 상품화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을 판매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시대로 갈수록 기업은 정신적인 가치(문화가 됐든 예술이 됐든)를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학문의 기본이 되는 인문학적 소양이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한 기업의 경쟁력은 물론 국가의 경쟁력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