創作벽장

시는 목적지가 없다 - 왜 쓰는가? /이승훈

이학 2007. 8. 3. 16:14
시는 목적지가 없다 - 왜 쓰는가? -이승훈-

정재학은 1990년대 후반에 등단한 신인으로 그 동안 매우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했다. 「정지한 태양」 (《문예중앙》, 1999년 겨울)에
서도 그의 개성은 그대로 드러난다. 한마디로 그것은 '정지한 태양'
이 암시하는, 빛이 사라진, 이성이 사라진,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현대인의 미로 같은 내면이다. 20세기 문학이 카프카, 베케트, 보르
헤스에 의해 집약된다면 이들의 흔적은 아직도 사라진 게 아니고 끊
임없이 재해석되고 있으며, 정재학은 카프카 계열이다 태양이 정지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시에서 그는 태양이 정지한 현실을 눈 하
나를 감아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다든가 회색 아침이 지속된다든
가, 낯선 글자들로 가득찬다고 말한다. 예컨대 '낯선 글자' 에서 그는

모든 언어가 감옥에 갇혀버린 아침
그 속에서 꾸는 낯선 꿈

처음 보는 듯한 오래된 글자들이
나를 노려보고 얼굴을 더듬거리는 엇갈림

땅에 떨어진 글자들을 주워
묻은 흙을 털어내자
그들은 의자가 되어
차곡차곡 쌓여졌다

고 노래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너무 아는 소리들만
하는 게 우리 시인들의 병이라면 이렇게 잘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건 우
리 시의 건강이다. 왜냐하면 시의 건강은 시의 병리학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병들수록 건강하고, 거꾸로 건강할수록 병이 들기 때문이
다. 서정시라는 이름으로 너무 건강한 시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 시가
병들었다는 증거이다. 언어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건강
한 것이 아니다.
정재학은 최소한 이 시대 언어가 병들었다는 것,모든 언어가 감옥
에 갇혔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 언어가 감옥에 갇힌 것인가? 언어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감옥에 갇혀야 할 자들은 언어가 아니라 인간이
다. 그러나 정재학은 언어가 감옥에 갇히고 그는 언어의 감옥에서 꿈
을 꾼다 감옥에 갇히면 바깥 현실과는 단절되는 감옥의 삶이 시작된
다. 그런 점에서 이제 언어는 현실과는 관계가 없다. 언어의 현대성은
감옥살이에서 시작된다. 이 감옥에서 그가 꾸는 꿈은 낯선 꿈이고, 그
꿈의 내용은 내가 글자들을 보는 게 아니라 글자들이 나를 노려본다
는 것, 말하자면 언어와 인간의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 인간이라는 이
름이 사라진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제 인간이 할 일은 땅에 떨어진
글자들을 줍는 일이다. 아마 21세기가 그렇지 않을까?
한편 등단한 시기가 비슷한 정남희는 「발자크」 (《시와 반시》, 1999
년 겨울)를 통해 이 시대의 글쓰기, 시쓰기, 소설쓰기의 허위를 폭로
한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신비, 진리, 본질,
초월적 가치 , 내면을 찾기 위해서라고 많은 시인, 평론가, 소설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리얼리즘 소설의 대가 발자크의 경우 글을 쓴 이유는
돈 때문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엔 놀음빛을 갚기 위해서였다.
이 아이러니, 이 역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돈 때문에 글을 쓸
수도 있고 무슨 정신적 가치 때문에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발자크

그는 돈 때문에 글을 썼으며 돈 때문에 나이 먹은 여자를 만났으며 돈
많은 과부를 꿈꿨으며 돈 때문에 도망다녔으며 감옥살이는 국민군 군무
기피 때문이지만 아무튼 돈 때문에 파산했으며 돈 때문에 더욱 더 돈 많
은 여자를…

찾아 헤맸다. 발자크가 누구인가? 1830년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정권
이 귀족에서 금융자본가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부르주아의 역동적 삶
을 살고 관찰하고 도망다닌 소설가이다. 당시 낭만주의자들은 부르주
아를 속물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리얼리스트답게 부르주아의 생활
력, 실행력을 사랑하고 과학, 진보, 산업 발달을 찬양했다. 한마디로
인간희극을 사랑했고, 그런 희극을 살았다. 이런 태도는 내숭을 떨지
않는다는 점에서 솔직하고, 삶의 내용과 작품의 아이러니라는 현대
성, 말하자면 사기, 허위, 거짓의 아아러니라는 현대성의 출발이다.
이만큼 솔직한 작가나 시인이 없다는 것은 우리 문학의 낙후성을 암
시한다. 발자크는 돈 때문에 발작적으로 글을 썼다.

나무는 늙은 여자?

그러나 우리는 돈 때문에 글을 쓰지 않는다. 돈에 대한 시도 쓰지
않는다. 돈에 대한 시는 김수영이 처음으로, 그것도 솔직하게 썼다.
김수영에게서 배울 것은 아직도 많다. 무엇보다 솔직성이다. 우리 시
가 재미없는 것은 한결같이 많은 시인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
문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허혜정은
자신이 있는 여성 시인이다. 최소한 그는 자신의 삶을 그럴 듯하게 위
장하지 않는다. 그는 나무 같은 것은 노래하지 않았지만,그런 점에서
무슨 신성이나 초월를 갈망하지 않았지만, 이 달에는 나무도 노래한
다. 그러나 그가 노래하는 나무는 최소한 고상한 나무가 아니다. 「나
무는 젊은 여자」 (《작가세계》, 1999년 겨울)에서 허혜정은 나무를

저 나무는 젊은 여자처럼 서 있다
자신을 폭발시키기를 기다리는 폭탄처럼
동심원의 빗장을 가슴에 단단히 지르고

너는 뿌리요 하늘을 향해
손 뻗친 가지요 무모한 갈망을 잡아당기면서
널 키우는 힘이요, 스스로의 발부리를 잡고 있는
족쇄요 분수를 꿈꾸는 수도꼭지요

라고 노래한다. 무슨 나무가, 그것도 젊은 여자처럼 서 있는 나무가
폭탄이고, 뿌리이고, 스스로를 키우는 힘이고, 족쇄요 수도꼭지인가?
이 시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정태적인 나무, 한결같이 한 곳에 서
있는 수동적인 나무, 세속을 초월한 신성한 나무가 아니다. 그는 족쇄
이며 수도꼭지인 나무를 사랑한다. 나무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역
동적 사물이고, 아니 역동성 자체이고 동시에 이 역동성을 감금하는
족쇄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산 위의 나무에 대하여 이렇게 말
했다. "높은 곳으로 밝음 속으로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강
하게 땅 속으로, 밑으로, 암흑 속으로, 심연 속으로, 악 속으로 향하게
된다"고. 그렇다.
악 속으로? 이 땅의 자연파 시 인들은 좀더 악 속으로, 족쇄 속으로,
허혜정이 노래하는 젊은 여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땅의 시인들
이 노래하는 나무는 늙은 여자다. 늙은 여자인 나무는 임신도, 출산
도, 생산도, 창조도 못한다. 늙은 여자를 노래하는 건 자유지만 늙은
나무는 역동성이 없다. 악속으로 들어갈 힘이 없다. 현대문학은 악과
함께 시작하고, 악이 선의 기원이고 뿌리이다. 늙은 나무는 현대가 아
니다. 이승훈은 이렇게 말했다.
송종규의 「나는 햇살 속으로 솟구쳤다」(《현대시학》, 1999년 12월)
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의미로서의 악이나 고통을 매개로 하는
역동성이다. 그가 이 시에서 노래하는 것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
은 안타까운 꿈이다. 이 안타까움은

몸 속에, 시계 하나를 걸어놓고 살았다
느리게 가는 시계 바늘을 앞으로 몇 칸 돌려놓고
원추리꽃이 피기를 기다렸고 다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젊어지셨고
축음기는 흐느적거리며 옛 사랑을 노래했다

고 노래된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간과 헤어져 밤차를 타고 다시 집으
로 돌아온다. 이제 축음기는 노래하지 않고 그는 생의 암호 같은 말
들만 손가락이 아프도록 쓰고 또 지운다'. 그가 햇살 속으로 솟구치는
것은 이런 고통, 쓰고 지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속에서
뭔가 반짝이고 그의 생은 높은 곳으로 밝음 속으로 올라간다. 왜냐하
면 그는 글쓰기라는 밑으로, 암흑 속으로, 심연 속으로, 고통 속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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