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Development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이학 2008. 8. 15. 22:59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경영이 인문을 만나야 하는 이유

 

인문학, 그 통찰의 힘

우리는 왜 인문학에 새삼 주목하는가? 다름 아닌 ‘통찰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다. 여기서 말하는 통찰은 ‘통찰(洞察)’이면서 동시에 ‘통찰(通察)’이다. 통찰(洞察)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인사이트(insight). 아울러 통찰(通察)은 곧 통람(通覽)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훑어 두루 살펴보는 것이다. 오버뷰(overview).

결국 통찰의 힘은 바로 통찰과 통람의 융합이며 인사이트와 오버뷰의 시너지다.

 

우리가 살고 있고 또 살아가야 할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통찰의 힘을 요청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 디지털 사회로 속진(速進)하면서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정신없어졌다. 예전에는 간단히 결론짓고 결정할 수 있을 법한 일들이 이젠 너무 많은 변수와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각각의 일들에 대한 분석적인 전문가들은 많아졌지만 정작 그들의 의견을 모두 모아 책임지고 판단하며 총괄적인 수준에서 결정할 사람은 선뜻 눈에 띄지 않는다.

분석의 힘은 커졌는지 모르지만 통찰의 힘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분석과잉, 통찰결핍」인 셈이다.

 

사람경영, 자아경영, 가족경영, 학교경영, 기업경영, 국가경영, 세계경영 등

그 어떤 분야의 경영에서든 오늘날 가장 시급하고 긴요한 것은 통찰의 힘이다. 그런데 그 통찰의 힘을 기르는 데 최고의 자양분이 바로 인문학(人文學), 즉 「후마니타스(humanitas)」다. 그래서 인문학을 다시 보는 것이다.

인문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인문의 위력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통찰의 힘을 얻기 위해서!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르네상스!

이 책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문학의 자양분을 섭취해 저마다의 삶의 밑동으로부터 통찰의 힘을 키우자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것을 키울 수만 있다면 이 책은 불쏘시개가 되어도 아깝지 않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감히 주창하는 슬로건은「인문경영」이다. 인문학에 바탕한 인생경영으로부터 기업경영, 국가경영까지 망라한 삶의 모든 경영이다. 나는 경영학을 따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인문경영을 내세운다.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살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통찰의 힘은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고로 통찰의 힘은 현장이 요청하는 힘이다. 날마다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또 치열하게 경쟁하며 매 순간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숨 가쁜 현장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통찰의 힘이다. 특히 뭔가를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겐 더 더욱 그렇다. 인문학은 바로 그 통찰의 힘의 밑동을 형성하는 자양분이다. 전장(戰場) 같은 시장에서 생존을 도모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하는 사업 현장에서 인문학과 인문경영이 새롭게 주목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2005 8월부터 매달 한 차례씩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주최하는

인문학 조찬특강「메디치21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이 책은 만들어졌다.

매 강의 때마다 500여 명의 CEO들이 운집한 것은 대단한 흥행 비결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다. 통찰의 힘을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낯선 인문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 깊은 호흡으로 통찰의 자양분을 섭취하고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의 각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강의를 통해 그 시대의 요구와 흐름에 부합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부르짖는 시대에 낯선 인문학 조찬강좌에 사람들이, 그것도 기업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CEO들이 500여 명씩이나 모여든 기현상의 본체요 진실이다.

 

인문학, 삶의 진정한 뿌리

하지만 이 책은 기업의 CEO만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나를 경영하고 스스로를 일으키려는 모든 사람들의 책이다. 12년 전 빈곤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언론인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 중인 비니스 워커라는 여죄수와 마주 앉았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다소 판에 박힌 질문에 20대 초반의 여죄수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는 의외의 답을 내놨다. 여죄수의 말이 종교적인 것을 뜻하겠거니 생각한 쇼리스가 “정신적 삶이 뭐냐”고 재차 묻자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빈곤은 밥과 돈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각과 정신의 문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빵일지 모르지만 정말 긴요한 것은 ‘자존감의 회복’이다. 가난한 이들도 연주회와 공연, 박물관과 강연 같은 ‘살아 있는 인문학’을 접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

이는 그런 경험들이 깊이 있게 사고하는 법, 현명하게 판단하는 법을

삶 속에서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죄수의 뜻밖의 대답에 자극받은 얼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인문학이 절실함을 깨닫고, 1995년 노숙자, 빈민, 마약중독자, 죄수 등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는「클레멘트 코스」를 열게 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활훈련’이라는 과정을 통해 물질적 빈곤을 극복케 하려는 기왕의 노력과는 달리, 클레멘트 코스는 철학과 시, 미술사, 논리학, 역사 등의 인문학을 가르침으로써 정신과 영혼의 힘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재활의지’를 갖게 하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전에 없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인문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무력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일상을 자율적이고 자신감있게 새로 시작하도록 이끌어주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다.

 

인문학의 숨은 힘

예부터 ‘문()·사()·철()’이라 했다. 문장과 역사와 철학이다.

먼저, 문장은 기교의 산물이 아니다. 문장은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이다.

더불어 역사는 포폄(褒貶)이다.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하고 나아갈 바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단지 관념의 퇴적이나 사념의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깊은 생각과 넓은 조망을 통해 삶의 진정한 원리를 발견해가는 살아 있는 운동이다. 이 문·사·철이 바로 인문학의 본령이다.

문·사·철은 세간에서 흔히 오해하듯이 결코 박제화된 관념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혼()의 운동이다.

 

지난 5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는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에게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물론 그에게 체육학이나 보건학 혹은 경영학이나 행정학 등의 학위를 수여할 수도 있었을 법한데 굳이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무하마드 알리의 삶과 그의 결코 패배하지 않는 혼()을 주목했기 때문이리라. 알리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엄혹한 프로복싱의 세계에서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두 번 잃었다가 다시 세 번 거머쥐며 진정한 승부근성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1980 38살 나이로 은퇴한 그의 프로 통산 전적은 ‘61 56(37KO) 5패’다. 하지만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위대한 복서는 파킨슨병이라는 생애 마지막 상대와 지금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는 패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패배마저 위대하게 만들 사람이다. 나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알리가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본다. 혼을 불사르는 그의 삶 자체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후마니타스, 즉 살아 있는 인문학 정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문학은 살아 있다. 그것은 피가 흐르고 땀으로 젖어 있다. 삶의 끈끈하고 처절한 몸부림과 절규가 녹아난 것이 인문학의 진짜 모습이다.

내가 인문학 강의에서 전쟁을 다루고, 극한의 탐험과 모험을 다룬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인문학은 ‘훈고학’으로만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활성화된 ‘변화의 학’이며 지속하는 ‘삶의 고투’에서 응어리져 빚어진 빛나는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문학은 살아 있다. 숨을 쉰다.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과 감각적 돌기들, 그리고 꿈이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욕망, 감각, 꿈이야말로 인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사실 그 어떤 통찰도 인간의 욕망, 인간의 감각, 그리고 인간의 주체할 수 없는 꿈을 아우르고 꿰차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다.

 

인간의 학명(學名)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생각만 하고 살지 않는다. 그래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이면서 동시에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뭔가를 끊임없이

‘만드는 사람’이면서 쉼 없이‘놀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이면서도 동시에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말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이다.

인문학은 바로 그 사람의 다면체적이고 변화무쌍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인문학, 즉 후머니타스는 말 그대로 사람의 학문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형성되는 존재이지 결코 완성되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휴먼(human)’이 아닌‘휴먼 빙(human-being)’인 것이다.

사람이 인간의 꼴을 내외적으로 형성해가려면 후마니타스, 즉 사람의 학문으로서의「인문학의 세례」가 꼭 필요하다. 아울러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게 만드는 영원한 숙제 그 자체다.

결국 인문학의 숨은 힘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이다.

이제 우리도 사람이 되어보자. 살아 있는 인문학을 통해서…  

 

<출처 :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 정진홍 박사, : 21세기북스>